이글은 낙동산악회 백두대간8기에서 대간종주중이신 도울님의 산행기 입니다.
◈백두대간 제20구간 종주.후기
⊙종주일:2010년 1월30일-31일(무박2일)토-일욜. ⊙날씨:맑음
⊙위 치:경북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충북 단양군.
⊙지상거리 14.14km = (차갓재-(2.6)-황장산-(0.92)-황장재-(4.56)-벌재-(6.06)-저수령 ※누계 381.16km
⊙실제거리 16.14km = (접속거리 약2km 생달리-(2.00)-차갓재) ※누계 412.82km
⊙종주코스 생달리-차갓재-송전탑-816-헬기장-작은차갓재-몟등바위암벽-황장산-황장재-985-암릉-1004-폐백이재-928-벌재-823-
들목재-문복대(운수봉)-옥녀봉-저수령휴게소. (단양 8경 중 사인암 경관)
⊙종주시간 7시간 10분 (03:30-10:40) ※총누계시간 7일 4시간 29분
※종주지도
☞종주후기및 개요
이른 새벽 3시 생달리 도착. 3시 30분 차갓재로 출발하였다. 주변 상황은 어둠의 고요함에 시골 마을이 잠들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간간이 짓어 되는 똥개의 멍멍 소리뿐이다. 날씨는 포근한 겨울의 날씨였다. 생각과 달리 눈이 많이 녹았다. 유달리 감명이 깊은 생달리 시골마을이다. 지난 구간 구석구석마다 들려서 시골 인심의 따뜻한 동정에 고구마도 맛보고, 시원한 물 한바가지의 동심을 회상하면은 어느 곳이든지 우리 민족의 따스한 정이 살아 있음을 일케어 준 마을이기 때문이다. 음력 섯달 열이레라 아무런 말도 없이 은하수의 달빛만이 우리들의 무사 종주를 위해 훤히 비쳐준다. 25여분 깔덕고개를 오르니 차갓재에 이런다. 이 곳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사방을 살펴보니 좌측에는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을 품은 채 우뚝 세워져 있으며, "백두대간 남한구간 중간지점" 표시의 돌비석에는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여! 시언이 쓰여져 있다. 어둠속의 산지에는 쭉쭉 뻗은 황장목이 날개를 펴고 있으며 그 사이 사이로 달빛이 유난히도 빛난다.
<차갓재에서>
차갓재에서 벌재까지는 입산금지 통제구간이라 동녁이 터기 전까지 벌재를 통과해야 한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송전탑을 지나 헬기장을 만난다. 여기까지의 산행길은 눈은 많이 녹았으나 낙엽 밑으로 얼어 붙은 길이 미끄러웠다. 몟등바위를 오르기 위해 아이젠을 이제서야 찬다. 몟등바위의 암벽은 두줄의 로프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운 암벽이었다. 시간이 지연된다. 위험한 구간의 암벽이라 능통한 김.노대장이 암벽의 위, 중간에서 일행들을 도와 준다. 5시 40분 황장산 정상에 도착한다. 황장산은 해발 1077m로서 어둠이 채 가지를 않아서 주변 경관은 고요와 달빛 뿐이다. 황장산의 유래를 살펴 보면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으로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1/25,000 지도에 황정산(黃庭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에는 작성산(鵲城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문경군지(1982년)에는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정확한 이름은 황장산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그것은 황장목이 많고 1925년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산악 명칭과 소재 높이』에 황장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노인들이 황장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작성(鵲城)과 봉산(封山) 표석이 있는 산이며, 울창한 계곡과 암릉이 산꾼들을 울먹인다. 그렇다면 봉산표석(封山標石)은 지방문화재 제227호로서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벌천계곡하류 합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숙종(1680년)때 이산에서의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으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장산에서 생산되는 황장목(소나무)은 목재의 균열이 적고 단단해 임금의 관(棺)이나 대궐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황장산(해발1077m) 정상에서>
천사봉을 넘어서니 치마바위의 경로가 위태로운 길로였다. 마치 여인의 한폭 치마 자락을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나마 낭랑 끝에 로프가 설치되어 안전을 도와 준다. 서서이 날이 밝아 온다. 폐맥이재를 넘어서니 7시 10분이다. 우려했던 벌재는 7시 50분 통과하였다. 벌재는 59번 국도와 접하는 곳으로서 해발 625m의 입간판이 크게 두개나 세워져 있었으며 입산 금지의 초소가 있었다. 59번 국도는 경북 문경시와 충북 제천군과 이어지는 도로이다. 초소 감시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도로옆에는 철조망이 가로 놓여 입산 금지를 알려 준다. 아울려 벌재라는 이름은 붉은재에서 왔다고 한다. 벌재의 남쪽마을이 문경시 동로면인데 이 이름에서 고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적성리의 적자가 붉을적 "赤"이어서 고개 이름이 "붉은재"가 된것을 이 고장 말로 벌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로를 건너 들목재로 가는 언덕바지 쉼터에서 빵과 우유로 조식을 채웠다. 언덕 고개를 넘어 내려막길 우측에는 큰 글씨로 백두대간 벌재의 안내 돌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그 뒤면에는 한반도의 백두대간 지도가 뚜렷이 그려져 있다.
<벌재의 모습>
들목재에 접어드니 8시 50분이다. 삼각형의 현수막이 들목재의 표시를 알린다. 유일하게 낙동산악회에서 표시를 남겨 준 흔적이 뚜렸이 보인다. 남쪽으로 문경시 적성리 마을이 북으로는 충북 단양군의 방곡리 마을이 숲나무의 틈새로 희끈이 보인다.
문복대 정상까지의 산행로는 눈이 쌓여 있는 곳도 많이 있다. 1시간쯤 오르니 9시 50분. 문복대 정상에 올라선다. 날씨가 희뿌려서 문경의 주봉 주흘산이 잘 보이지를 않는다. 문복대(門福臺)는 일명 운수봉이라 불리우며 해발 1074m로서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예천군을 지나 문경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지켜서서 복(福)을 불러오는 문(門)과 같은 첫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줄기가 북으로 뻗어 수리봉, 신선봉과 도락산을 두고 있다. 백두대간상의 산으로 백두대간이 죽령, 도솔봉, 향적봉, 저수령을 지나 문경시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큰 산을 이루었는 산이며, 경북 문경시와 예천군, 충북 단양군의 경계지점에 우뚝 솟아 저수령과 벌재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문복대(운수봉)해발 1074m 정상>
옥녀봉을 지나 저수령에 도착 10시 40분이다. 저수령은 경북과 충북으로 이어지는 927번 지방도로와 접하는 고개이다. 저수령(低首嶺)이란 이름은 지금의 도로를 개설 하기 이 전에 험난한 산 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여 지나 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이었다고 하고, 한 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銀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 되어 왔다. 백두대간은 북쪽의 백두산에서 남쪽의 지리산까지 길이가 약 1,400km이며 남한은 향로봉(강원도 고성)에서 684km에 이르고 한반도의 주요 산들을 포함하고 있다. 저수령은 해발 850m로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으로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을산리와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의 경계를 예부터 저수령이라 불리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회령(檜嶺)으로도 부른 것으로 보인다.
<저수령에서>
저수령에서 중식겸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단양 8경 중 하나인 사인암을 들려 경관을 살펴 보았다. 단양 8경은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중 맑은 운계천을 따라 명명된 운선구곡 중 일곱번째 계곡인 사인암은 푸르고 영롱한 옥빛 여울이 수백 척의 기암절벽을 안고 휘도는 곳. 수려한 절경을 간직한 덕분에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곳에 단양팔경의 제5경에 속하는 사인암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재임한 임재광 선생은 단양 출신인 고려말 대학장 역동 우탁 서생이 사인 벼슬로 재직할 당시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사인암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마치 해금강을 연상케 하는 사인암의 풍광은 그 어떤 뛰어난 예술가가 그와 같은 솜씨를 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선을 압도한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암벽 위에 선연한 격자무늬, 마치 어깨 위 날개처럼 도드라진 노송의 어우러짐은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보는 이의 가슴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최고의 화원이라 칭송받던 단원 김홍도도 사인암을 그리려 붓을 잡았다가 1년여를 고민했다고 하니 그 복잡미묘한 매력을 평범한 심미안으로 만끽할 수 있을까? 겨울이라 끙끙 얼어 붙은 청수를 감사주는 기암 괴석의 암벽이 당당이 빛을 내고 있었다. 사인암에 들려 부처님께 무언의 절을 올린다.
<사인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