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죽령-삼형제봉-도솔봉-묘적봉-묘적령-솔봉-뱀재-시루봉-저수령
총예상거리 19K 총실거리(GPS) | ||||||
총예상시간 9시간 총산행시간 | ||||||
순서 |
지명 및 고도 |
거리 |
도착 |
출발 |
예상시간 |
비교 |
1 |
죽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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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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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샘터갈림길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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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도솔봉4.7K 죽령1.3K) |
4 |
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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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도솔봉4.2K 죽령1.8K) |
5 |
흰봉산갈림길1288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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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도솔봉2.7K 죽령3.3K) |
6 |
삼형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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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지 |
7 |
도솔송1315.6 H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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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지 |
8 |
묘적봉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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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묘적령 1025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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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모시골 H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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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묘적령1.7K 모시골1.7K) |
11 |
솔봉 1102 |
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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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
뱀재 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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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모시골1.9K 흙목정산2K) |
13 |
흙목 1033.5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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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헬기장2K 싸리재1.2K) |
14 |
싸리재 H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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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흙목정산1.2K 매재950M) |
15 |
유두봉 1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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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지(단양 대강면 방향) |
16 |
배재 |
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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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싸리재950M 투구봉2.6K) |
17 |
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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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시루봉 1116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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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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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투구봉 |
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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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지(경북 영주 가재봉방향) |
21 |
촛대봉 10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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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지(경북 예천 상리면방향) |
22 |
저수령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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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점 1개 (솔봉 1102m) | ||||||
헬기장 8개 | ||||||
조망지 중간 중간 많음 |
* 지도
예상고도
☞도솔봉
위치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 / 경북 영주시 풍기읍
높이 : 해발 1,314.2M
지정 : 소백산국립공원(小白山國立公園)
도솔봉은 산이름에서 풍겨나오는 느낌은 점잖은 도인의 인자하고 미소띤 얼굴이 산위로 떠오르는 느낌을 주는 산이다. 실지 도솔봉은 그런 산이다. 소백산(小白山) 비로봉의 높이와 명성에 가려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깨달은자의 미소가 도솔봉을 찾는 이들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산이 도솔봉이다. 봉(峰)자가 붙은 산 중에서는 왠지 억울한 산이있다. 소백산 품안에 있기에는 너무 큰 산세를 자랑하는 도솔봉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자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되는 산... 그 산이 단양의 명산(丹陽의 名山) 도솔봉(兜率峰)이다
☞묘적봉
위치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높이 : 해발 1,148M
소백산국립공원(小白山國立公園) 묘적봉은 이름 대로라면 뭔가 기묘함이 쌓여 숨겨져 있거나 보여주어야 하는데 실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니, 보여주는데 세속에 사는 인간의 가슴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간직한 산이 묘적봉이 아닌가 싶다. 소백산맥의 한쪽켠을 그리 낮지않은 지세로 수억년을 안착한 묘적봉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로의 회상이었다. 묘적봉 안부에 자리잡은 묘적령은 죽령과 함께 경상북도 풍기와 충청북도 단양을 이어주는 주요한 인도로 자리잡은 삶의 길이 였다. 그 길을 따라 수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만들어 지고 기쁨과 슬픔의 발자국을 묘적령에 아로새기며 이 땅의 역사는 만들어져 왔다. 구 한말 일제침략에 맞서 의병들의 활동무대였던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는 소백산자락에 위치하여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상대하기에 좋은지형을 갖춘 마을이었다.
☞저수령(底首嶺,850m)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고개이다. 이 고개 이름이 저수령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도로가 나기 전에는 길 험하고 숲 우거져 지나는 이들이 절로 머리를 숙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왜적의 목이 잘렸다는 의미를 담은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통쾌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고개의 이름으로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숲 우거지고 길 험하여 절로 고개를 숙였다는 의미의 저수령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기품 서린 고개의 모습에 어울리는 듯했다. 산이란 본래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씻어내고 비워 겸허함을 가르치는 곳이니 말이다
☞죽령
백두대간에 나란히 자리한 여기 죽령과 문경새재·추풍령을 일러, 영남과 기호지방을 통하는 관문의 삼형제라면 죽령은 바로 그 맏형격이다. 그 연대, 그 자리, 그 높이, 그 구실이 단연 으뜸인 때문이다.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89m의 죽령. 삼국사기에『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漆夫) 등 여덟 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 (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만한 하다.
서기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 장장 2천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대동맥의 한토막이었던 이 길은 근래 교통수단의 발달로 행객이 끊겨 수십년 숲덩굴에 묻혀 있었던 바, 이제 옛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는 뜻에서'99. 5월 공공근로사업으로 이 길(2.5km)을 다시 열었고 '99. 8월 죽령 옛길 안내판(희방사역 및 죽령고개 2개)과 전설안내판(옛길 요소요소에 5개)을 설치하여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가족단위의 새로운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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